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티투스의 짧은 치세와 도미티아누스 시대 ==== AD 7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사망하자 예정대로 그의 아들인 티투스가 다음 황제가 되었다. 티투스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유대 전쟁을 마무리했을 만큼 군사적인 능력이 출중했고, 아버지가 황제가 된 이후에는 근위대의 지휘를 맡아 아버지의 권력강화에 앞장섰다. 이런 이유로 그는 원로원과 민중들에게 이미지가 냉혹하고 비열하다고 알려졌다. 그러다가 AD 79년 황제로 즉위했다. 티투스는 태생부터 유쾌하고, 따뜻하고 사려깊은 사람인데다 워낙 유능하고 공정했다. 따라서 황제가 된 뒤, 이런 그의 본 모습을 알게 된 원로원과 민중들은 티투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가지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티투스의 치세는 문자 그대로 그와 로마 모두에게 끔찍했다. AD 79년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부유한 캄파니아 일대가 큰 피해를 입어, [[폼페이]] 시가 땅 속으로 매몰되었다. 이어 이듬해에는 로마 대화재가 일어났으며 AD 81년에는 로마에 페스트까지 창궐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모두 본국 이탈리아 안에서 벌어진 일인데다, 황제가 선정을 베푸는 상황에서 예기치 못하게 터진 일이라 고생이 컸다. 더구나 티투스는 평소의 불규칙한 생활로, 밤낮 바뀐 사생활로 유명했기에 2년 내내 터진 자연재해와 전염병 퇴치로 인한 과로는 건강한 티투스의 명을 단축시켰다. 따라서 그는 AD 81년 불과 재위 2년 만에 사망했다. 티투스 사후, 그 뒤는 동생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가 물려받았다. 티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의 제9대 황제로 즉위한 도미티아누스는 허영심이 많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재위시절 형인 티투스와 똑같은 호민관 특권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었다. 이 때문에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나 형이 재위 2년만에 사망하는 행운 속에 로마 황제가 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통치 면에 있어서 전제군주적인 성격을 보여줬는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대신 로마 원로원을 약화시키기 위해 로마 속주 총독을 원로원 의원이 아닌 에퀴테스에게 맡도록 변경하였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브리타니아에 대해서는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까지 군대를 진군시켰고 AD 85년 도나우강 건너편의 다키아족이 국경을 침입하자 이를 직접 격퇴하였다. 그러나 AD 88년 다키아족이 2번째로 침공해오자 로마 1개군단이 괴멸되고 군단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어려움을 겪은 끝에 AD 89년 막대한 금품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다키아족 왕 [[데케발루스]]와 겨우 강화를 맺으면서 그 위상이 많이 실추되고 말았다. 도미티아누스는 상당히 엄격했고, 법집행의 공평함을 공공영역에서의 최대 가치로 여겼다. 따라서 로마 공화정기부터 쉽게 해소되지 않던 불법, 편법들과 부정부패가 과거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시대가 연상되듯 상당수 사라졌다. 이런 이유로 평민과 군인들은 도미티아누스를 지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스스로를 절대시하고, 대놓고 원로원을 무시해 이는 황제와 원로원 간의 대립각을 심화시켰다. 그렇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이를 의식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도미누스(주인님) 등으로 부르게 하고 예법을 만들어 형식상 공화국인 로마 제국의 주권자인 원로원을 계속 자극한다고 비난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험악해지는 가운데, 도미티아누스는 고발자 제도를 활용해 공포정치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AD 89년 상(上)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이었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은 하(下)게르마니아 속주의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도미티아누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처형하였고 원로원 의원들도 종종 반역죄로 고발해 사람들을 고문하고 잔혹한 심문기법까지 만들어내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설상가상 도미티아누스는 개인적인 가정사도 복잡하여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데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타인에겐 청렴을 강요하고 엄격함만 요구했다. 결국 AD 96년 도미티아누스는 황궁에서 암살됐다. 야사에 따르면, 황후 도미티아에게 포섭된 노예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고 전해지나, 이는 확실하지 않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공포정치에 신음하던 로마 원로원은 기뻐하며 도미티아누스을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이어 군대가 움직이기 전에 서둘러, 오래된 귀족 출신의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렇게 프린키파투스(원수정)을 확고히하고 팍스로미나의 문을 연 플라비우스 왕조는 3대 만에 단절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